싸구려 볼편, 잠자는 만년필.
나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 10살 때부터 내 글씨는 악필이었다. 글씨 쓰는 일이 가장 싫었다.
그런 나에게 20대 초반에 구입한 파커 만년필이 있다. 만년필을 쓰면 글씨체가 좀 더 아름답게 나올까 하는 기대감때문이었을까. 만년필의 필기감을 느껴보고 싶어서 구입했다. 잉크 카트리지를 하나 끼워서 강의를 들을 때나 각종 메모를 할 때도 만년필을 사용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고 물론 글씨체가 더 좋아지진 않았다. 오히려 걸리적 거리는 것이 많았다. 툭하면 수성잉크가 종이에 번지고, 손에도 뭍고, 떨어뜨려서 펜 촉이라도 망가질까봐 신경이 쓰였다. 한 자루 밖에 없는 탓에 잃어버릴까봐 언제부터인가 필통안에 두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만년필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꺼내본 만년필의 수성잉크는 말라서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볼펜을 꺼내 쓰게 되었다. 싸구려 볼펜들. 모나미153, BIC 이런 것들. 흔히 볼 수 있는 정말 싸구려 볼펜말이다.
지금도 나는 급하게 써야 할 때 모나미153을 주로 쓴다. 잃어버리거나 고장나도 아쉬운게 없으니까. 수명도 얼마나 길고 고장도 안나는지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고 언제나 잘 써졌다.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써본 적이 없다. 다 쓰기도 전에 잃어버렸으니까.
오랜만에 열어본 나의 필통에는 모나미153볼펜 한자루가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쓰던 파커 만년필과 잉크카트리지도 있었다.
나는 모나미153을 꺼냈고 몇일뒤에 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떤 펜을 써볼까
내가 손에 쥔 볼펜은 BIC 오렌지 볼펜이다. Fine Easy Glide. 이 녀석도 정말 흔한 볼펜이다.
써보니 필기감이 나쁘지 않다. 아니 이거 싸구려 치곤 엄청 부드럽고 편안하게 잘 써진다.
만년필보다 애착이 가는 펜이 되었다. 여전히 나의 글씨는 악필이지만 말이다.
만년필을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지 않으려면 필통안에 고이 모셔두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만년필이 만들어진 이유는 아닐 것이다. 나는 필통안에 잠자고 있는 만년필보다 여기저기 굴러다녀도 누구하나 관심갖지 않는 볼펜을 손에 쥔다. 느낌이 좋다.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
펜심을 꺼내 잉크가 얼마나 남았나 확인해보고는 다시 끼워둔다. 얼마 못가 또 잃어버리겠지만 나는 또다른 볼펜을 찾을 것이다.